2025년 11월, DevQuasar라는 닉네임의 하드웨어 마니아가 이베이(eBay)에서 AMD BC-250 기판을 단돈 60달러에 구입했다. 이 기판의 태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소니의 품질 검수를 통과하지 못한 플레이스테이션 5(PS5)용 프로세서를 AMD가 수거하여 암호화폐 채굴용 연산 카드로 재활용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채굴 붐이 꺼진 뒤 채굴 서버 전량이 전자폐기물 취급을 받으며 헐값에 매각되었다. DevQuasar는 이 기판을 주워와 서드파티 바이오스(BIOS)를 설치하고, 냉각 장치를 개조하며, 3D 프린터로 케이스를 출력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기계는 사이버펑크 2077을 구동하고 있다.
단 하나의 실리콘 조각이 불과 3년 사이에 “콘솔 게임기 → 암호화폐 채굴기 → 전자폐기물 → 게이밍 PC”라는 완전한 윤회의 궤적을 밟았다. 칩 자체의 물리적 기능이 고장 난 적은 없었다. 고장 난 것은 칩을 둘러싼 시장의 내러티브뿐이었다.
PS5 입성에 실패하고 채굴장으로 좌천된 칩
BC-250의 핏줄은 소니의 품질 관리 라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S5에 탑재되는 맞춤형 APU는 AMD가 TSMC의 7나노미터(nm) 공정을 통해 위탁 생산한다. 실리콘 웨이퍼에서 잘라낸 모든 다이(die)에는 미세한 물리적 차이가 발생하며, 소니는 엄격한 성능 규격을 요구한다. GPU는 36개의 컴퓨트 유닛(CU)을 온전히 갖추어야 하고, 동작 클럭, 소비 전력, 누설 전류까지 모두 기준선을 넘어야 한다.
기준에 미달한 다이라고 해서 곧바로 폐기 처분되지는 않는다. AMD는 결함이 있는 다이를 모아 문제가 있는 연산 유닛을 비활성화한 뒤 재포장하여 판매한다. BC-250에 들어간 칩이 바로 이러한 “컷다운(cut-down)” 프로세서다. GPU는 36 CU에서 24 CU로 축소되었지만, CPU는 젠 2(Zen 2) 아키텍처 기반의 6코어 12스레드를 온전히 유지하고 16GB GDDR6 통합 메모리를 탑재했다. 하드웨어 커뮤니티에서는 이 카드를 두고 “PS5 입시에 낙방하여 광산으로 끌려간 칩”이라는 절묘한 별명을 붙였다.
AMD는 이 칩을 BC-250 연산 카드로 만들어 애즈락(ASRock)에 납품했고, 애즈락은 이를 12장 장착한 4U 랙마운트 채굴 서버로 조립하여 채굴장에 대량 납품했다. 채굴에는 화면 출력 포트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해시레이트만이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BC-250 기판에는 디스플레이포트(DisplayPort), USB, 기가비트 이더넷, 저장장치용 M.2 NVMe 슬롯, 8핀 PCIe 전원 단자까지 완벽히 갖추어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일반 그래픽카드처럼 생겼지만, 본질은 완전한 기능을 갖춘 단일 보드 컴퓨터(SBC)였던 셈이다.
채굴 붐 붕괴 이후, 전자폐기물로 전락한 하드웨어
2022년 암호화폐 시장이 폭락하면서 채굴은 막대한 이익을 내던 사업에서 순식간에 적자 사업으로 전락했다. 수많은 채굴장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방대한 양의 채굴기가 중고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BC-250의 운명은 일반 그래픽카드보다 훨씬 참담했다. 일반적인 게이밍 그래픽카드로서의 중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시장에서는 “채굴 잔해물, 부품용 고철”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이베이에서 BC-250 보드의 가격은 60달러에서 100달러 선까지 곤두박질쳤다. 이 가격으로는 시중의 보급형 외장 그래픽카드조차 살 수 없지만, 직접 손을 대고 개조할 의지만 있다면 6코어 Zen 2 CPU와 24 CU RDNA 2 GPU, 16GB 통합 메모리를 갖춘 완전한 컴퓨터 한 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DevQuasar가 공개한 작업 일지를 살펴보면 개조의 진입 장벽은 결코 낮지 않다. BC-250은 기본적으로 16GB 메모리를 CPU와 GPU에 각각 8GB씩(또는 4GB/12GB) 분할 할당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게임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커스텀 3.00 버전 바이오스로 펌웨어를 교체하고 칩셋 설정 메뉴에서 VRAM 할당량을 512MB로 강제 축소해야 한다. 직관에 어긋나는 조치처럼 보이지만, 이 기기는 외장 그래픽카드가 아닌 APU이므로 GPU가 메모리를 고정 점유하는 대신 시스템 메모리 전체를 동적으로 VRAM처럼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이러한 설정이 필수적이다. 또한 서버용 밀폐형 방열판은 핀을 구부리거나 잘라내는 파괴적인 가공을 거쳐야만 120mm 듀얼 팬을 장착할 수 있다. 운영체제 역시 윈도우용 그래픽 드라이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 리눅스(Manjaro 등 Arch 계열)를 설치해야 한다. 본체 케이스는 3D 프린터로 직접 제작해야 했다.
사이버펑크는 돌아가지만, 4K 레이트레이싱은 금물
커뮤니티의 실측 벤치마크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준수했다. 사이버펑크 2077은 1080p 해상도의 낮음 그래픽 옵션에서 쾌적하게 플레이 가능한 프레임레이트를 기록했으며, GTA V, 카운터 스트라이크 2(CS2), 히트맨 3 역시 무리 없이 구동되었다. 성능 수준은 현대의 입문용 외장 그래픽카드에 근접한다. 최고 옵션의 화려한 화면은 기대할 수 없지만, 엄연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머신으로 기능한다.
사진: BC-250에서 측정한 Cyberpunk 2077 프레임레이트. 출처: DevQuasar
사진: 과거 ASRock이 배포했던 12카드 탑재 BC-250 채굴 서버. 현재는 분해되어 중고 시장으로 유입되었다. 출처: DevQuasar
사진: DevQuasar가 3D 프린팅 케이스로 제작한 미니 게이밍 PC. 출처: DevQuasar
사진: 인터페이스를 모두 갖춘 BC-250 기판. 본질적으로 단일 보드 컴퓨터다. 출처: DevQuasar
해커뉴스(Hacker News) 토론의 핵심은 경제성의 득실 계산에 모였다. 60달러짜리 본체이지만 전력 소모는 결코 적지 않다. 애초에 채굴 전용으로 설계된 기판이라 아이들(idle) 상태의 전력 효율이 고려되지 않았으며, 장시간 사용 시 발열과 전기 요금은 무시할 수 없는 숨은 비용이 된다. 또한 채굴장에서 1년 내내 가혹하게 가동되면서 발생한 콘덴서 노후화와 부품 수명 문제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에 대해 DevQuasar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어차피 60달러짜리 물건이다. 망가지면 또 한 장 사면 그만이다.”
망가진 것은 칩이 아니라 시장의 내러티브였다
BC-250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게임 성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공급망이 지닌 “폐기물 재생 경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웨이퍼에서 생산되었으나 소니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불합격 판정을 받은 다이를 AMD가 채굴 카드로 되살려냈다. 채굴 붐이 붕괴하면서 경제적 가치를 잃고 전자폐기물로 버려졌던 카드를 DIY 사용자가 60달러에 주워와 다시 살려냈다. 실리콘의 물리적 수명은 시장이 만들어낸 그 어떤 내러티브의 수명보다 훨씬 길다.
이 순환 속에는 절대적인 승자도, 패자도 없다. 소니는 합격품 칩을 확보했고, AMD는 불량 재고로 2차 수익을 올렸으며, 채굴업자는 호황기에 돈을 벌었고, 사용자는 폭락 후 저렴한 하드웨어를 손에 넣었다. 유일하게 지속적인 대가를 치르는 것은 환경뿐이다. 기판이 거래되고 용도가 전환되는 매 단계마다 진짜 폐기물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BC-250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전자폐기물”이라는 꼬리표가 얼마나 자의적인 것인지를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시장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던 칩도 쓰임새를 바꾸면 사이버펑크를 돌리는 훌륭한 게임기가 된다. 채굴 붐의 붕괴가 파괴한 것은 가상화폐의 수익 모델이었지 실리콘 칩의 물리적 성능이 아니었다. 60달러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는, 당시 시장의 내러티브가 무엇을 “쓰레기”로 규정했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참고 링크:
- DevQuasar의 BC-250 개조 가이드 (GitHub 저장소)
- Hacker News 토론 스레드
- AMD BC-250 제품 사양 및 커뮤니티 벤치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