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리조나주의 그랜드 캐니언을 찾아 수백 미터 높이의 벼랑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붉은빛과 갈색이 겹겹이 층을 이룬 거대한 암벽 장관에 압도당하게 된다. 차곡차곡 쌓인 암석 지층은 마치 지구라는 거대한 제빵사가 구워낸 천 겹의 시루떡이나 밀푀유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정교한 암석 줄무늬 속에는 지질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이 숨겨져 있다. 절벽의 특정한 경계면에 손가락을 대어 보면, 바로 윗부분은 약 5억 2천만 년 전에 형성된 캄브리아기 사암과 셰일이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 빈틈없이 맞닿아 있는 어두운 결정질 변성암은 무려 18억 년 전의 원생대 지층이다.
두 암석 층은 마치 하나의 돌처럼 단단히 붙어 있지만, 그 틈 사이에서는 약 10억 년에 달하는 지구 역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증발한 시간은 지구의 46억 년 전체 역사 중 4분의 1에 육박하는 방대한 세월이다. 고대 얕은 바다를 누비던 삼엽충의 시대부터 원시 단세포 생물이 번성하던 태고의 시기까지, 지구라는 역사책에서 거대한 한 권 분량의 지층 기록이 통째로 뜯겨 나간 셈이다.
지질학계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지층이 불연속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 거대한 틈새를 **‘대부정합(Great Unconformity)‘**이라고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가설이 대립해 온 가운데, 영국 사우샘프턴 대학교의 토머스 거넌(Thomas Gernon) 교수가 이끄는 국제 연구진이 지질학 권위지인 ‘지질학(Geology)‘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명쾌한 물리적 해답을 내놓았다. 과거 북미 대륙이 쪼개지는 과정에서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절벽이 솟아올랐고, 이 절벽과 빙하가 함께 작용해 10억 년 치의 암석을 남김없이 깎아냈다는 것이다.
시루떡처럼 쌓인 절벽 단면, 그 사이에 증발해 버린 10억 년
지층은 지구가 스스로 기록해 온 자연의 일기장이다. 진흙, 모래, 자갈 등이 바다나 호수 바닥에 차례로 가라앉고, 세월의 압력을 견디며 굳어져 암석이 된다. 일반적인 지질 법칙에 따르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오래된 시대의 지층이 나타난다. 콜로라도고원을 깊이 1.6킬로미터나 파고든 그랜드 캐니언의 협곡 벽면은 본래 지난 20억 년간의 환경 변화를 끊김 없이 보여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5억 2천만 년 된 타피츠 사암(Tapeats Sandstone) 바로 밑에는 응당 존재해야 할 10억 년 치의 지층이 감쪽같이 비어 있다. 이는 마치 총 200쪽짜리 집안 족보를 펼쳐 50쪽까지 읽었는데, 다음 장을 넘기자마자 불쑥 150쪽이 나타난 것과 같다. 그 사이에 벌어진 혼인과 이주, 집안의 대소사 기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꼴이다.
과거 과학자들은 이 공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가설을 세웠다. 당시 지표면이 너무 건조하고 높은 고지대여서 새로운 퇴적암이 쌓이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었고, 양극지방의 빙하가 적도까지 뒤덮었던 ‘눈덩이 지구(Snowball Earth)’ 시절에 거대한 빙하가 대패처럼 기존 지층을 밀어내 버렸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평탄한 지형에서 빙하가 긁어낸 힘만으로는 이토록 넓은 대륙에 걸쳐 수 킬로미터 두께의 암석이 왜 지역마다 불균등하게 깎여 나갔는지 온전히 증명하기 어려웠다.
초대륙이 갈라지며 솟아오른 2킬로미터 낙차의 거대 절벽
거넌 연구팀은 지금으로부터 약 8억 년 전, 초대륙 ‘로디니아(Rodinia)‘가 분열하던 시기로 시선을 돌렸다. 당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육지는 하나로 뭉쳐 있었다. 하지만 맨틀 깊은 곳에서 거대한 열이 축적되면서 대륙 판을 양쪽으로 찢어발기는 엄청난 장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북미 대륙의 뼈대인 ‘로렌시아(Laurentia)’ 대륙이 로디니아에서 쪼개져 나갈 때, 대륙의 가장자리는 매끄럽게 갈라지지 않았다. 지하 열에 의해 지각이 급격히 솟구치고 찢어지면서, 로렌시아 대륙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수직에 가까운 ‘대절벽(Great Escarpment)‘이 형성되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이 고대 절벽은 현재의 알래스카에서부터 유타, 애리조나주에 이르기까지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길게 이어졌으며, 절벽의 수직 낙차는 무려 1에서 2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러한 지형은 초대륙 분열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오늘날 남아프리카의 드라켄즈버그 산맥이나 브라질 동남부 해안 절벽에서도 여전히 관찰할 수 있다.
그림: 고대 북미 대륙(로렌시아) 서쪽 경계를 따라 알래스카에서 애리조나까지 뻗어 있던 거대 고대 절벽(점선). 출처: T.M. Gernon et al/Geology, 2026; Ron Blakey/Deep Time Maps, via Science News
깎아지른 절벽을 대패질한 빙하: 두께 8킬로미터의 암석을 지워내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절벽의 등장은 지표면 침식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평평한 육지에서는 빗물에 의한 풍화와 깎임이 완만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지형이 단숨에 1000에서 2000미터나 치솟아 오르면, 내린 비는 절벽을 타고 곤두박질치는 급류로 돌변한다. 가파른 낙차를 타고 돌진하는 물살은 모래와 자갈을 휘감아 절벽 기저부를 무섭게 때렸고, 절벽 면은 빠른 속도로 내륙을 향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요인은 절벽이 형성되던 시기가 지구 전체가 얼어붙었던 ‘눈덩이 지구’ 시기와 정확히 맞물렸다는 점이다. 수천 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절벽 꼭대기는 눈이 쏟아져 쌓이는 거대한 저장고가 되었고, 이곳에 얹혀 있던 거대한 빙하들은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암석 대패 공장’으로 돌변했다.
빙하는 깎아지른 수직 절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며 톱니바퀴 같은 위력으로 기저부 암석을 긁어냈다. 엄청난 높이 차이에 힘입은 빙하와 맹렬한 해빙수의 복합 작용으로, 모델 계산 결과 고대 북미 대륙 가장자리에서 무려 5에서 8킬로미터(국소적으로는 최대 10킬로미터) 두께의 암석이 통째로 깎여 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히말라야산맥 전체의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 산줄기를 뿌리째 갈아 없앤 것과 맞먹는 규모다.
그림: 고대 북미 대륙(로렌시아) 가장자리에 형성되었던 거대 절벽 지형 복원도. 출처: 사우샘프턴 대학교 톰 거넌 교수, Phys.org 제공
판 구조 복원으로 밝혀낸 고대 해안선: 침식의 중심에 선 그랜드 캐니언
연구진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전 지구적 판 구조 운동 복원 데이터와 지형 진화 물리 모델을 결합하여 고대 로렌시아의 지형을 정밀하게 재현했다. 지하 맨틀의 열적 융기, 중력에 의한 절벽 붕괴, 그리고 강물과 빙하의 침식 과정을 시뮬레이션한 결과는 북미 대륙 전역에 남아 있는 실제 지층 단면 데이터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지형 복원 결과는 그랜드 캐니언 일대가 당시 거대 절벽이 내륙으로 물러나는 이동 경로 한가운데에 정확히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랜드 캐니언 지역은 대륙에서 침식이 가장 격렬했던 핵심 구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랜드 캐니언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륙 침식 벨트의 한복판에서 당시 지각이 겪은 극단적인 풍화와 박리의 상처를 가장 선명하게 보존해 둔 대표적인 지질학적 표본 지점이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앨런 콜린스(Alan Collins) 지질학 교수는 “판의 분열로 생겨난 거대 절벽 모델은 지층 결손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 매우 간결하고 역학적으로도 지극히 타당하다”라며 높이 평가했다.
태고의 공백에서 드러난 진실, 절벽이 증언하는 대륙의 격변
콜로라도강의 물줄기가 파고든 현대 그랜드 캐니언의 협곡 자체는 고작 500만 년에서 600만 년 전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계곡의 웅장한 암벽에 박혀 있는 바위들은 아득한 태고의 기억을 품고 있다. 협곡에서 사라진 10억 년의 세월은 결코 무의미한 빈칸이 아니라, 지구 대륙 판이 갈라지고 재편되면서 남겨놓은 거대한 상흔이었던 셈이다.
연구진은 이 메커니즘을 호주나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고대 대부정합 지대에도 확장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초대륙의 분열과 이에 따른 거대 절벽의 형성, 그리고 혹독한 빙하기의 침식이 맞물려 지구 표면의 겉모습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는 분석이다.
그랜드 캐니언의 사라진 10억 년은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절벽의 장엄한 드라마를 증언한다. 초대륙 로디니아의 파열이 빚어낸 천 길 낭떠러지와 눈덩이 지구의 빙하가 합작하여 지워낸 장대한 역사. 지질학이라는 자연의 기록에서 비어 있던 한 페이지는, 대륙이 쪼개지고 다시 태어나던 지구의 역동적인 숨결로 가득 차 있었다.
참고 링크:
- 사이언스 뉴스(Science News) 보도
- Phys.org / 사우샘프턴 대학교 공식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