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억 명의 지속적인 극통: 신경이 ‘허위 경보’에 갇힐 때
일상생활에서 뜨거운 물을 따르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데면,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리게 된다. 이러한 찰나의 급성 통증은 신체가 위험을 피하도록 돕는 생존에 필수적인 보호 기제다.
하지만 신경 손상으로 인한 지속적인 극심한 고통, 즉 신경병증성 통증(neuropathic pain, 신경이 끊임없이 경보를 울리는 상태에 갇힌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일상은 완전히 다르다. 피부를 스치는 미풍이나 옷감의 마찰, 심지어 이불을 덮는 가벼운 무게만으로도 타는 듯한 작열감이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끊이지 않는다.
전 세계 인구의 약 10%(약 8억 명)가 이 같은 만성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바펜틴(gabapentin)과 같은 기존 진통제는 효과가 제한적인 데다 어지럼증과 졸음을 유발하기 일쑤다.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opioids)는 심각한 중독과 내성 위험을 안고 있다.
통로를 틀어막는 기존 진통제의 한계: 왜 만성 통증에는 통하지 않는가
통증 신호의 전달은 세포막 단백질에 의존한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압 개폐성 나트륨 통로 Nav1.8(voltage-gated sodium channel Nav1.8,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막 통로)이다.
Nav1.8 통로는 주로 유해 수용체 뉴런(nociceptor, 손상 자극을 감지하는 감각 신경)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유해 자극을 받으면 나트륨 통로가 열리고, 나트륨 이온이 세포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뇌로 전달되는 통증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과거 진통제 개발의 기본 접근법은 Nav1.8의 구멍(포어)을 틀어막는 방식이었다. 미국 FDA는 2025년 버텍스(Vertex)사의 저나벡스(Journavx, 성분명 수제트리진/suzetrigine)를 승인했으나, 이 약물은 급성 통증에만 적용된다. 통로의 구멍을 억지로 틀어막는 것은 거센 수문을 억지로 막아서는 것과 같아서, 신경세포가 대체 방전 경로를 찾아 활성화되기 때문에 기존 약물로는 만성 신경병증성 통증을 지속적으로 완화하기 어려웠다.
사진: 통증 신경망은 병리적 자극을 받으면 지속적으로 전기 신호를 발생시킨다. 출처: Science Photo Library(Nature).
세포막의 ‘걸쇠’ 단백질로 시선을 돌린 과학자들
보스턴 소아병원 클리포드 울프(Clifford Woolf) 연구실 연구진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논문의 제1저자인 라신 파월(Rasheen Powell)은 이온 통로가 세포막에 영구적으로 고정된 정적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다. 단백질은 세포막 안팎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동적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연구팀의 추적 결과, Nav1.8 통로가 세포막 표면에서 고밀도의 흥분 방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스캐폴드(발판) 단백질 덕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안키린-G(ankyrin-G, 일명 Ank3, 통로를 세포막에 고정하는 발판 단백질)다.
Ank3는 세포막 안쪽에 박힌 금속 걸쇠처럼 작동하여 Nav1.8 통로를 세포막 표면에 단단히 붙잡아 둔다. Ank3 걸쇠의 고정이 사라지면 Nav1.8 통로는 세포막 표면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결합 부위를 가로채 통증 통로를 세포막에서 퇴출시키는 모방 펩타이드
이 기전을 바탕으로 연구팀은 새로운 간섭 분자를 설계했다. 바로 짧은 지질화 펩타이드인 SLiP(short lipidated peptide)이다.
SLiP 펩타이드는 세포막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지질 꼬리를 지니고 있어 신경막 내측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한다. 이 펩타이드 구조는 Nav1.8과 Ank3 사이의 결합 부위를 정밀하게 모방하여 분자 미끼(디코이) 역할을 수행한다.
세포막에 들어간 SLiP 펩타이드는 Ank3 발판 단백질의 결합 부위를 경쟁적으로 선점한다. Ank3 걸쇠를 잃어버린 Nav1.8 통로는 세포의 세포내이입(endocytosis) 작용에 의해 세포막 안으로 흡수되어 퇴출된다. 세포막 표면의 통증 스위치 개수가 급감하면서 과도하게 흥분했던 신경세포는 평온을 되찾는다.
사진: 세포막에 박혀 있는 이온 통로 단백질의 구조 모식도. 출처: Getty Images(Fierce Biotech).
발판 해체로 신경 흥분을 잠재우다: 위험 회피 본능은 그대로 보존
이 연구 결과는 2026년 10월 6일 국제 학술지 ‘셀 리포트 메디신(Cell Reports Medicine)‘에 게재되었다. 실험 결과, SLiP 펩타이드 투여는 신경병증성 통증 모델 생쥐의 통증 과민 행동을 뚜렷하게 완화했다.
이 같은 발판 해체 전략은 결정적인 강점을 지닌다. 병리적인 고빈도 신경 방전은 차단하면서도, 정상적인 급성 위험 회피 통증 반사는 온전히 보존한 것이다. 생쥐는 뜨거운 물체에 발이 닿았을 때 여전히 신속하게 발을 움츠렸다.
보스턴 소아병원은 이미 이 기술을 2023년 설립된 바이오 스타트업 미메틱 메디신스(Mimetic Medicines)에 라이선스 아웃했으며, 연구팀은 현재 장기 지속형 SLiP 후보 물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통로를 틀어막던 방식에서 세포막 지지대를 해체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은 전 세계 8억 명의 만성 신경병증성 통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 링크:
- Nature 뉴스 보도
- Cell Reports Medicine 원본 논문
- Fierce Biotech 연구 보도
- News-Medical 공식 보도자료